
가을 햇살이 포도잎 사이로 스며들던 어느 오후, 전남 함평의 한 포도밭에서 특별한 수업이 펼쳐졌다. 해보 초등학교 1·2학년과 병설 유치원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포도넝쿨 사이를 가득 채웠다.
"굿비잉 안녕, 오늘도 만나서 반가워요!"
아이들의 인사 소리가 포도밭을 가로지르는 순간, 이곳은 더이상 단순한 포도밭이 아니었다. 이곳은 아이들이 '잘 사는 법'이 아닌 '잘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교실이었다.
이날 진행된 것은 굿비잉 이너스쿨(한국아동청소년마음근력공동체) 소속 송희숙 교사의 비잉 프로젝트(BEING Project) 수업이었다. '따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송 교사는 "세상이 언제나 따뜻한 봄이 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자연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근력을 키우는 특별한 배움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마음근력이란 무엇인가? 속도 사회 속 '존재의 회복'
우리 아이들은 끊임없는 '행동(Doing)'의 속도 속에 살아간다. 학원 시간에 맞춰 뛰어가고, 과제를 해치우고, 성취를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정작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멈춰 서지 못한다.
굿비잉 이너스쿨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아동·청소년 정서 교육의 핵심은 무엇을 더 많이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회복하게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근력이란, 감정을 억누르거나 없애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균형을 찾아가는 내면의 힘이다. 굿비잉 이너스쿨은 아이·부모·교사가 함께 '잘 존재하기(Well-being)'를 실천하는 마음근력 공동체로, 명상·체험·대화를 통해 몸과 감각을 회복하고 내면의 균형을 기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BEING의 다섯 원리, 자연 속에서 펼쳐지다
비잉 프로젝트는 다섯 가지 원리로 구성된다. 이 원리들은 단순한 명상 단계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경험하고 회복하는 흐름이다.
1. Breathe (숨쉬기) - 온몸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첫 걸음
2. Embrace Awareness (알아차림을 품기) - 세상과 나의 감각을 깨닫기
3. In the present (지금 여기 존재하기) -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기.
4. Nourish Balance (균형 돌보기) - 마음의 중심을 회복하며 조화롭게 존재하기
5. Gratitude (감사하기) - 나와 세상을 잇는 고마움을 느끼기
이 다섯 원리를 따라, 포도밭에서의 배움은 조용히 시작되었다.

Breathe: 불가사리처럼 온몸으로 숨쉬는 아이들
수업은 '굿비잉 노래'로 시작됐다.
"내가 지금 여기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서로를 바라본다. "포도야, 안녕~!" 포도밭 전체가 따뜻한 인사로 물들었다.
이후 아이들은 돗자리에 누워 '불가사리 숨쉬기 명상'을 경험했다. 불가사리는 특별한 폐나 아가미 없이 온몸으로 숨을 쉰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제 다리도 숨 쉬어요!"
짧은 명상이었지만, 아이들의 몸은 이미 살아 있는 호흡의 교과서였다. 호흡은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리듬이다.
독일 하버드 의과대학의 Hölzel 박사 연구팀(2011)은 마음챙김 명상이 자율신경계를 조절하고 감정 반응성을 낮추며 뇌의 자기인식 영역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아이들은 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몸의 감각과 중심을 되찾고 있었다.

Embrace Awareness: 흙의 온기로 깨어나는 알아차림
"걸어가자, 걸어가자, 포도밭으로~"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아이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흙을 밟는 순간이었다.
"발이 간지러워요!"
"흙이 따뜻해요!"
햇살의 온기, 바람의 감촉, 포도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아이들의 '외부 알아차림'이 되었고, 그 속에서 "지금 내가 여기에 있구나"라는 내면의 감각이 조용히 자라났다.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인 현대 아이들에게 자연 체험 학습은 단순한 야외활동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감각을 회복하고, 세상과 연결되는 경험이다. 포도밭의 흙, 햇살, 바람은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마음챙김 명상 도구였다.

In the present : 해먹 위에서 느낀 '지금 이 순간'
포도를 딴 후 아이들은 해먹으로 향했다. 해먹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선생님, 하늘이 움직여요!"
"바람이 나한테 와요!"
움직임과 멈춤 사이의 리듬, 지금-여기 존재하는 감각. 케임브리지 대학의 마크 윌리엄스(Mark Williams) 교수와 존 티즈데일(John Teasdale) 교수는 마음챙김에 기반한 인지치료(MBCT) 연구에서, 'Doing 모드에서 Being 모드로의 전환'이 정서 회복력과 주의 조절 능력을 높인다고 밝혔다.
아이들의 해먹 위 웃음은 바로 그 균형의 체험이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없이, 그저 흔들리는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의 마음은 회복되고 있었다.


Nourish Balance: 작은 갈등 속에서 피어난 균형의 지혜
포도를 따는 동안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선생님, 포도가 너무 많아요."
누군가 포도를 빨리 따려다 서두르고, 누군가는 천천히 하고 싶어 한다. 송희숙 교사는 아이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
멈춤과 움직임, 집중과 놀이가 조화를 이루었다. 작은 갈등이 생기면 "괜찮아, 같이 따면 돼." 행동(Doing)과 존재(Being)의 균형은 서로를 기다리고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자라났다.
이때 송 교사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질문을 건넸다.
"지금 네 안에서는 어떤 감정이 올라오고 있니?"
연세대 김주환 교수(2023)는 『내면소통: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근력 훈련』에서 인간의 마음을 경험자아, 기억자아, 배경자아의 세 층으로 설명한다.
경험자아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과 감각을 느끼는 나, 기억자아는 그 경험을 해석하고 이야기로 저장하는 나, 배경자아는 그 모든 과정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관찰하는 나'다.
포도밭에서의 멈춤과 기다림, 그리고 "괜찮아"라는 한마디는 바로 배경자아가 깨어나는 알아차림의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친구와의 다툼 속에서도 "화가 나지만, 그 화를 보고 있는 나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감정과 자신을 분리해 바라보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Gratitude: 포도 만다라에 담긴 작은 우주
마지막 활동은 '포도 와플 만다라' 만들기였다. 아이들은 와플 위에 포도를 올리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행복해요."
"조금 슬퍼요."
"아까 친구가 재미없대서 속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포도알마다 마음이 담겼다. "행복도, 슬픔도, 화도 다 나예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감정을 없애는 법이 아니라, 품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만다라(Mandala)'는 산스크리트어로 '원'을 뜻하며, 전체성과 조화를 상징한다. 아이들이 만든 포도 만다라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었다. 각자의 내면이 외부 세계와 이어지는 작은 우주이자, 존재의 중심을 회복하는 상징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채정호 박사(2023)는 "웰빙(well-being)은 단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날 아이들이 보여준 감사의 순간은 바로 '잘 존재하기(Well-being)'의 한 장면이었다.

존재로 자라는 아이들, 우리 교육의 미래
그날 고인돌농장은 배움의 학교였다. 숨쉬기에서 감사까지 이어진 다섯 원리의 흐름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은 한층 단단해졌다.
성과보다 존재, 경쟁보다 연결. Doing과 Being의 균형은 아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다. 멈춤과 움직임이 어우러질 때 진정한 배움이 흘러간다.
포도밭을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숨을 느끼며 멈춰 설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더 많은 성취가 아니라, 지금 여기 존재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굿비잉 프로젝트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연 속에서, 명상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아이들은 행동 속에서 존재를 배우고, 존재 속에서 다시 행동을 배웠다.
포도밭에 핀 만다라처럼, 우리 아이들의 마음도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고 있었다.

프로그램 정보
장소: 전남 함평군 해보면 산내길 458-26 고인돌농장
주관: 굿비잉 이너스쿨(한국아동청소년마음근력공동체)
글 / 따봄 송희숙 교사
편집/ 힐링뉴스
프로그램 문의 : mindfulhappiness@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