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손가락만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숏폼 영상에 익숙해진 세대. 그렇게 디지털 과몰입의 시대를 살아가는 충북의 학생들에게, 지난 5월 충북교육청이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을 시작했다. 바로 '마음쓰담' 프로젝트다.
'글을 쓰고 마음에 담으며, 마음을 쓰다듬어 나를 채우다'는 의미를 담은 이 프로젝트는 필사와 명상이라는, 어쩌면 느리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아이들의 마음 건강에 접근한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지금, 충북의 교실에는 조용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청주 솔밭중학교 도서관, 오후 2시
도서관 한쪽에 둥그렇게 모여 앉은 학생들. 차분한 표정으로 펜을 들고 좋은 글귀를 한 자 한 자 옮겨 적는다.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필사한 글귀를 낭독하며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또렷하지만 부드럽다.
필사가 끝나면 명상 시간이다. 선생님을 따라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한다. 공간을 채우는 싱잉볼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학생들은 긴장을 내려놓는다. 이것이 충북교육청의 '마음쓰담' 프로젝트가 학교 현장에서 펼쳐지는 실제 모습이다.
펜을 들고 마음을 쓰기 시작한 아이들
충북교육청은 5월 12일,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도내 200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된 필사 지원단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성장 단계에 맞춘 필사 자료 수집에 나섰다. 전문가 감수를 거쳐 탄생한 것은 4종의 '마음글 필사노트'였다. '도담도담 자라는', '반짝반짝 빛나는', '중학생을 위한', '고등학생을 위한' 노트는 각각의 발달 단계에 맞춰 시, 소설, 산문, 고전, 노래가사, 영화대사 중 '나, 너, 우리'에 관한 감동적인 글들을 담아냈다.
동시에 명상 콘텐츠도 만들어졌다. 특별한 점은 이 콘텐츠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학생과 교사가 직접 참여했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무용, 연기 등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만들어진 20종의 명상 프로그램은 조례·종례 시간, 점심시간 직후, 수업 전후 등 학교 일상 곳곳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제 기분을 잘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청주 솔밭중학교 1학년 임태은 학생의 말에는 솔직함이 묻어난다. "제 기분을 잘 알게 되는 것 같고 마음이 차분해지니까 공부에도 집중이 되는 것 같아요." 디지털 기기 속 빠른 자극에 익숙한 10대가 느린 필사와 고요한 명상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작은 기적처럼 들린다.
같은 학교 박계순 교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본인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려야지 주변 친구들하고도 공감할 수 있어서 수업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인식이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학습 효과로 연결되는 선순환. 이것이 바로 '마음쓰담' 프로젝트가 만들어내는 교육의 새로운 풍경이다.
7월 9일, 충북 교육문화원 대공연장에서 열린 '마음쓰담 비전 공유 한마당'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800여 명의 교직원과 학생, 학부모가 모인 이 행사에서 솔밭중 2학년 강은지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명상을 하며 내 마음을 돌보게 됐고, 친구의 기분도 더 잘 이해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는 모든 학교에서 명상과 필사를 시작해볼 것을 권유했다.
청주 대성초등학교 박보라 교사의 말도 인상적이다. "필사는 단순한 글쓰기 활동이 아니에요. 학생들이 글로 쓰고 마음을 채우며, 나와 너, 우리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AI 시대, 더 중요해진 공감과 성찰
윤건영 충북교육감은 이 프로젝트의 철학을 명확히 밝혔다. "AI시대 더 중요한 것은 공감과 성찰입니다. 명상과 필사가 그것을 해결해 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는 역설. 그것을 해결하는 열쇠가 바로 천천히 글을 쓰고, 조용히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명상과 필사는 학생들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타인과 건강하게 연결되는 힘을 길러주는 가장 따뜻한 마음 훈련입니다." 윤 교육감의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이 '따뜻한 훈련'이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곳곳에 피어나는 마음챙김 공간
특별한 변화도 감지된다. 명상과 필사를 위한 특화 공간을 갖추는 학교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을 넘어, 물리적 공간을 조성하며 마음 건강 교육을 학교 문화로 뿌리내리려는 시도다.학생들은 명상 콘텐츠를 직접 만드는 과정에서 명상의 효과를 체험하고, 창작자로서의 경험까지 쌓고 있다. 프로그램의 수혜자이자 동시에 창작자가 되는 이 독특한 구조는, 학생들의 주도성과 몰입도를 더욱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느림의 힘, 고요의 가치
흥미로운 점은 이 프로젝트가 별도의 거창한 예산이나 시설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노트와 펜, 그리고 잠깐의 시간만 있으면 된다. 명상 역시 특별한 장비나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 교실 자리에 앉아, 또는 도서관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침 등교 후 5분, 점심 식사 후 10분, 하루를 마무리하는 종례 시간. 짧지만 의미 있는 이 순간들이 모여 학생들의 '마음 근육'을 키워가고 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디지털 콘텐츠와 달리,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쓰는 필사는 그 자체로 명상이 되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시간이 된다.
학생들이 디지털 기기를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호흡 소리를 듣는다. 화면의 빛 대신 종이 위에 펜을 그어가며 좋은 문장을 음미한다. 이 느린 행위들이 모여 스트레스는 줄어들고 집중력은 높아진다. 디지털 교육 강화에 따른 부작용을 예방하는 해법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에서 찾아진 것이다.
충북 교육의 새로운 철학으로 자리잡은 '마음쓰담'프로젝트
충북교육청의 계획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연말 각 학교의 명상, 필사 수업 우수 사례를 공유하고, 내년에는 더욱 체계적인 교수법을 개발해 보급할 방침이다. 6개월간의 실험이 긍정적인 결과를 내면서, 이제 '마음쓰담'은 단순한 프로젝트를 넘어 충북 교육의 새로운 철학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한 글자씩 옮겨 쓰며 마음을 채우고, 고요히 호흡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충북의 학생들은 이 작지만 큰 변화를 통해 AI 시대에 더욱 필요한 능력, 바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힘을 기르고 있다.
충북교육청의 '마음쓰담' 프로젝트는 그렇게,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충북 교육의 미래를 바꿔가고 있다.
